인생은 즐거워/서재

철학자의 스크랩북: 3. 그 너머의 이야기

세실 Cécile 2022. 10. 22. 16:13

안녕하세요, 디디예요😉

저번 시간에 이어 좋은 글귀들을 이어서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삶과 죽음에 관련된 문장들에 대해서 적어보겠습니다.특히 몇몇 이야기들은 일화의 형태로 서술되고 있어서 더욱 마음 속에 남았는데요.이 감동을 여러분도 함께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너머의 이야기
  '영혼'의 앞길에 생명의 강이 나타났다. 영혼은 그강을 건너야 했다. 영혼의 눈에 먼저 갈대가 띄었다. 영혼은 그것으로강을 건너려고 했다. 그러나 영혼이 갈대를 손으로 짚으며 몸을 기울이자, 갈대의 가느다란 줄기가 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영혼은 다시 막대기를 발견하고는 그것으로 강을 건너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막대기의 뾰족한 끝부분이 강바닥에 박혀버렸다. 영혼이 그걸 뽑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영혼은 강물에 빠진 채 막대기 옆에 서 있었다.
  그러다 영혼은 다시 강가로 나와 넓적하고 굵은 통나 무를 발견하고는 "이거면 되겠군." 하고 속삭였다. 이어서 영혼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통나무가 워낙 물에 잘 떠서 흘러가는 바람에 영혼은 한 걸음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영혼은 강가에 서서 외쳤다.
  "오, 생명의 강이여! 어떻게 건너야 하오리까?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실망만 시키고 있소."
  그러자 생명의 강이 대답했다. '너 혼자 건너보려무나.' 이 소리를 듣고 영혼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혼자 강을 건넜다.<올리브 슈라이너>

 

만일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그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일 것이다. 한 순간도 더 보장되지 않는 생 명을 매일 이런 식으로 반성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인 삶의 태도가 있을까?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들이쉬는 호흡은 단지 우리의 마지막을 향한 첫 걸음 일 뿐이다. 우리의 인생은 놀랄 정도로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생은 똑같은 출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 인간은 상실하고 죽고, 희망을 품고 두려워하고, 자기 자신과 타인들을 초조하게 만들도록 태어났다. 누구에게나 닥칠 재앙에 대비한 대책은 덕행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진정한 환희의 바탕이 바로 양심이기 때문이다.<세네카>

 

주여, 저로 하여금 꾸민 이야기로 도덕을 논하지 않도록 해주시고, 의미 없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해주소서.
제가 일을 경시하지 않을 만큼만 물질을 존중하게 해주소서.
제가 생명을 지닌 말과 사람들을 매우 정직하게 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강물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에도 맑은 것이 최고의 자질이라는 것을, 그리고 작은 양의 순수한 것이 많은 양의 잡다한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저에게 보여주소서.
깊은 속의 빛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겉의 색깔을 보는 방법을 저에게 가르쳐주소서.
현실의 베틀로 인간사의 직물을 짜는데 따를 긴장을 버텨낼 수 있는 어떤 이상(理想)을 저에게 주소서.
제가 사람보다 책을, 생명보다 기술을 더 소중히 여기지 않도록 해 주소서.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재판관인 천사들이 그의 얼굴을 직시한 다음에 손가락 끝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신체의 구석구석을 다 살편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천사가 죽은 자의 신체를 두루 살피는 이유는 이렇다.
  사람의 의지나 생각은 몽땅 뇌에 각인된다. 의지와 생각이 뇌에서 처음 시작하여 신체의 각 부위로 전달되어 거기서 마무리된다. 그러므로 마음에 일어난 일은 무엇이든 뇌에 남고, 뇌에서 각 신체 부위로 흘러간 흔적도 고스란히 남는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육체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기에 천사들은 죽은 자의 신체 구조에서 그의 자서전을 읽어내는 것이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긴장이 팽팽한 어떤 공간에 들어갔는데 그 안의 모든 것이 당신을 밀어내는 것 같이 느껴진다. 단 일 분도 견디지 못할 만큼 숨이 턱턱 막힌다. 그래도 당신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시점이 조수의 흐름이 거꾸로 바뀔 때이기 때문이다. <해리엇 비처 스토>

+ 저는 이 문장이 정말 크게 와 닿았어요. 거친 조수와 파도. 이 두 단어만으로도 문장과 마음 속에서 물결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 같아요. 저도 굳건히! 삶을 지켜내야겠습니다.)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아직까지 나는 고독만큼 편한 동행을 알지 못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 혼자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인생은 하나의 미완성 작품이며, 두 개의 영원 사이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보다 앞섰던 모든 존재들의 영향을 받으며, 또 나보다 뒤에 올 모든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생을 알차게 가꾸는 유일한 길은 시야를 넓히는 것뿐이다. <윌리엄 엘러리 채닝>

 

인생이란 아주 섬세하여서 곧잘 상처를 입는다. 인생의 길엔 그 길을 벗어나게 만들 일이 언제든 벌어진다. 모든 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헛된 괴로움들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방해가 더 없이 큰 괴로움의 씨앗이 된다. 작은 글자가 쉬이 눈을 피로하게 만들 듯 사소한 일들이 우리를 가장 심하게 괴롭힌다. <미셸 드 몽테뉴>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상당 부분을 천재성을 발휘할 재료를 수집하는 데 쏟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발명이란 것도 엄격히 말하면 그 전에 이미 모아져 기억 속에 담겨 있던 이미지들을 새롭게 결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못한다. 재료를 하나도 쌓아두지 않은 사람은 그러한 결합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수한 사람들의 연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을수록 무언가를 발명해낼 능력 또한 그만큼 더 커진다. 역설적으로 들럴지 모르지만, 당신의 생각도 그만큼 더 독창적으로 보 일 것이다. <조슈아 레이놀즈>

 

어떤 것을 수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때, 그때 진정한 기준은 거기에 악의 요소가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악의 요소보다 선의 요소가 더 많은지 여부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나쁘기만 한 것도 거의 없고 좋기만 한 것도 거의 없다. 거의 모든 것에는, 특히 거의 모든 정부 정책에는 나 쁜 요소와 좋은 요소가 함께 섞여 있다. 나쁜 요소와 좋은 요소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 요소와 선의 요소 중 어느 것이 더 큰지에 대해 끊임없이 현명하 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인생은 양이 아니라 질에서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이 허락된다. 그 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1년을 사는 것보다 100년을 사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거기엔 조건이 있다. 단순히 땅 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 답게 살 수 있어야 그런 말이 가능한 것이다. 누구나 식물로 한 세기를 사느니 인간으로 1년을 사는 길을 택할 것이다. 누구나 인생을 양이 아닌 질로 이해한다. 과거를 뒤돌아보면, 하루 혹은 일주일이 그를 전후한 몇 년보다 기억에 더 뚜렷한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런 하루 혹은 일주일은 그 저 존재하기만 한 몇 년의 세월보다 그 의미 면에서 더 길다. 말하자면 그날 하루 혹은 일주일을 더 치열하게 살았다 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에는 짧은 시간이 오히려 더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많은 날과 해를 산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일과 사랑과 투쟁과 기쁨과 골칫거리를 살았다. 인생은 언제나 영혼의 기준에 의해 그 질로 평가된다.
  게다가 인간의 발달에는 아주 고무적이고 또 위안을 주는 법칙이 하나 있다. 우리가 산술적인 비율로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인 비율로 성숙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삶은 예전의 삶에 단순히 보태지는 것이 아니고 곱해진다는 뜻이다. 새롭게 얻은 사고는 그 사람의 과거의 생각에 그냥 보태지는 것이 아니라 곱해져 들어간다. 그러면서 그것이 새로운 관점이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모든 사실들과 생각들을 그 관점에서 다시 보게 된다. 산을 한 걸음 더 오르면 사방으로 지평선이 더 넓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생의 전체적인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옛날의 삶에 곱해져 들어가는 그 새로운 삶의 증가분이다. 우리는 어제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어제는 운명처럼 우리 위를 덮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전체 성취 에 곱하여져 들어갈 오늘의 삶의 요소에는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략)
  정말, 세월의 강은 가차없이 흐른다. 세월의 강의 흐름을 잡아놓을 수만 있다면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싶을 때도 있고, 그 강물이 더 빨리 흘러갔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세월의 강 앞에서 그 흐름을 바꿔놓으려는 어떠한 욕망도, 어떠한 노력도 똑같이 소용이 없다. 일을 하든 잠을 자든, 성실하든 게으르든, 기쁨에 겨워 있든 고통에 신음을 토하고 있든, 세월의 강은 저항에 머뭇거리는 일 없이 한결같은 흐름으로 흘러만 간다. 우리가 세월의 강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그 강의 물이 오늘 당신의 삶의 물레방아 바퀴 위를 흐를 그 때 뿐이다. 그 물이 과거가 되는 순간, 그 것은 이미 되돌아올 수 없는 영원의 거대한 바다로 흘러간 뒤이다. 다른 기회들이 올 것이고, 다른 물들이 흘러올 것이다. 하지만 사용되지 않은 채 흘러가버린 물은 영원히 잃어 버리게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에드워드 하워드 그리스>

+ 식물로 한세기를 사는 것이 더 멋지다고 생각할 때도 있답니다^.^

 

  슬픔을 말로 미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잘 안다. 그래도 나는 모든 무덤들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다.
  삶과 죽음이 동등한 왕으로 군림하는 여기 이 세상에선. 우리 모두는 죽은 자들이 겪은 모든 것들을 직편할 만큼 용감해야 한다. 미래는 두려움으로 가득하며, 냉혹한 과거로 인해 때가 묻고 더럽혀져 있다. 불가사의 한 생명의 나무에서 잎과 꽃이 잘 익은 과일과 함께 떨어지고, 대지의 공용 침대에서 가장들과 아이들이 나란히 잠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모든 것들에 닥칠 일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삶과 죽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 축복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무덤이 이 생명의 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인지, 아니면 이곳의 밤이 또 다른 곳의 새벽이 아닌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또 이 세상에 태어나 말도 한 마디 제대로 못해 보고 얼마 품에 안겨 죽어가는 아이가 더 행복한지 아니면 긴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산전수전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끝에 지팡이와 목발에 의지하며 고통스럽게 마지막 걸음을 힘겹게 옮겨놓는 노인이 더 행복한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요람은 우리에게 "어디서 왔니?" 라고 묻고, 관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는 거니?"라고 묻는다. 이 물음 앞에서는 가난한 야만인도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법복을 갖춰 입은 최고 권위의 성직자만큼 현명하게 대답할 수 있다.
가난한 야만인의 슬픈 무지도 성직자의 부질없는 말만큼 위로가 된다.
  삶의 지평선으로 무덤이 설핏 보이는 위치에 선 사람에게는 미래가 고통과 눈물로 가득할 것이라고 예언할 권리가 없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주는 것이 바로 죽음인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존재가 결코 죽지 않는다면, 아마 그 사랑은 금방 시들어버리고 말 것이다. 아마 죽음이라는 공통의 운명이 우리의 가슴들 사이의 오솔길에 자란 이기심과 증오의 잡초를 밟아 죽이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이 없는 영생을 사느니 죽음이 왕인 곳에서 살며 사랑하는 쪽을 택하겠다. 만일 우리가 이곳에서 사 랑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 알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작은 무덤가에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서 있는 사람들에겐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 죽음은 아무리 나쁜 형태일지라도 똑같이 완벽한 휴식이다. 남은 자들의 슬픔은 삶이 일상적으로 요구하는 것들, 말하자면 시간마다 해야 할 의무와 필요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 가벼워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들에게도 이 무덤이 안식과 평화의 장소, 환희의 장소가 될 것이다. 그들에게 위안이 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죽은 자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산다면, 그들의 삶도 확실히 우리들의 삶만큼 괜찮을 것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모두 같은 어머니의 자식들이며, 똑같은 운명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종교를 갖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산 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고, 죽은 자들을 위해 희망을 품어라. <로버트 그린 잉거솔>

 

  인생은 한 편의 위대한 비극이라는 견해에서 나는 더없 이 큰 위안을 얻는다.
  인생에는 환희의 섬들이 있고, 순수한 축복의 안식처도 있다. 또 아이들의 웃음이 있고, 젊고 아름다운 시절의 사랑의 광휘가 있고, 만년의 끈끈한 사랑의 빛도 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광휘와 빛의 주변에 언제나 비극이 펼쳐지고 있거나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비극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직면해야 하는 죽음의 비극이 있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견해는 음울하고 우울하고 감상적인 관점이 아니다. 위대한 비극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지 않고 감정을 고양시킨다. 어떤 비극의 5막이 끝나고 막이 내릴 때, 관객은 격한 감정에 따른 긴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분이 고양되는 것 을 느낀다. 힘이 빠져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분이 한껏 고조된다.
  위대한 음악은 사람의 영혼 속을 흐른다. 그러면 사람은 높은 창공을 날듯 가벼워짐을 느끼고 자신이 지나쳐온 연민과 공포의 심연들이 저 아래로 보이는 것 같다.
  인생의 거울이랄 수 있는 비극에는 패배와 승리가 적절히 뒤섞여 있다. 패배와 승리가 무대 위에 등장한다. 거기에 폐허가 있다. 하지만 그 폐허 위로 영광이 빛을 발하고 있다. 무대 위의 비극의 효과는 우리가 동경하는 주인공의 위대한 자질에 의해 나타나게 되지만, 그의 본성에 있는 약간의 결점 때문에 그 자질이 아주 만족할 정도로 표현되지는 못한다. 혹은 주인공은 어떤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가슴에 어떤 숭고한 목표를 품고 있다. 그 결점은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환경에 있다. 아직 그에게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그가 다뤄야 할 사람들은 그의 기준보다 떨어진다. 그리고 그는 실패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실패하면서 자신이 열망해왔던 숭고함을 그 어떤 것보다 더 두드러지게 드러내 보인다.
  이런 비극을 무대에서 우리 인생으로 옮겨보자. 우리의 인생에는 막강한 힘들이 작용한다. 어떤 위대하고 고귀한 기질이 사물과 사람들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려 한다. 그러나 조건들이 아직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그 위대함은 끊임없이 깨어지고 있고, 고귀함은 실패하고 있다. 위대함과 고귀함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조건이 불충분하고. 유한한 것이 무한을 구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실패는 그런 기질에 잠재해 있는 무한성을 촉발시킨다.
  일도 이롭고, 공감도 이롭다. 삶의 일상적인 모든 환경에서 자기 자신을 가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엾다고 생각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인생은 하나의 위대한 비극이라는 생각, 폐허 위로 영광이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 더없이 큰 위안을 준다. <펠릭스 아들러>

 

이번 게시글로 '철학자의 스크랩북'의 소개는 마무리하려고 해요.

제가 소개드린 금언들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면모들을 소개하고 시야를 넓히는 글들이 많으니

꼭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다음에 만나요, 안녕!😉